아이는 과격했다. 특히 ‘화’ 라는 감정의 파도가 밀려들 땐 더욱 그랬다. 처음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는 행동을 하더니 이어선 뒤에 뭐가 있든 없든 무조건 드러누워 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곳이 비록 비가 오는 길바닥이든, 땡볕에 이글거리는 횡단보도 한복판이든,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이든, 한창 움직이는 유모차 안에서든 시간과 장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과격함을 선보였다. 그것이 꼭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무이인 것 마냥. 

시위였다. 엄마 말을 절대 듣지 않겠다는 선언과 반항의 표현. 하, 심호흡을 한다. 말이 느린 아이는 유독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이 아이가 지금 다 알고서 그러는 건지, 내가 이 때만큼은 쉬이 져줄 거라는 걸 아는지 화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만났거나 어떤 일에 대해 제지를 당하면 유난히도 떼가 심하고 자지러지게 감정을 표현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나도 덩달아 드러누워 버리고 싶은 맘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걸 꾹꾹 눌러 참으며 조용히 아이를 달래거나 잽싸게 안고서 자리를 피했다. 아니면, 그냥 드러누운 아이만 두고 앞서 가버렸다. 효과는 도망치기가 제일 좋았다. 결국은 눈물바람으로 쫓아 올 거면서 왜 굳이 길 한복판에서 독불장군마냥 고집을 부리는지 도통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양상이 두세 살 때 유난히 심했다. 심각하게 우리 애만 그러는가 싶어 주변에 물어보니 그런 아이가 간혹 있다고 해서 조심스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네 살에 들어서서는 아무데서나 드러눕기가 많이 나아졌는데 이번엔 그 양상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예를 들면 삐쳐서 방에 들어가 버리거나 눈을 꼭 가자미마냥 흘겨보는 것, 그리고 동네가 떠나가라 괴성을 지르는 것으로 표현이 되었다. 특히 아빠와 부딪힐 땐 사정없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언제까지 이런 식의 표현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 때 자신의 속상한 마음을 말로 표현해 볼 수 있게 도와주라는 조언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또 다른 생각. 그건 알록달록 일곱 빛깔의 무지개였다.

무지개떡, 무지개 케이크, 먹이에 따라 달라지는 달팽이의 화려한 무지개똥, 앉는 곳과 기분에 따라 몸 색깔이 무지개처럼 자유롭게 변하는 카멜레온.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알록달록, 형형색색 빛나는 무지개 색깔들이었다. 이 색깔들을 감정에 대입해 보는 건 어떨까. 유명한 작가의 어느 그림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본 것 같아 아이에게도 적용해보기로 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빨강은 화가 많이 났다는 뜻, 검정은 화가 아주 많이 났다는 뜻, 노랑은 제일 좋아하는 색이라서 행복하다는 뜻이며 초록은 배가 고프다는 뜻이란다. 제 나름대로 색깔마다 감정을 쉽게 표현했다. 이 때를 계기로 화가 용솟음 칠 때마다 아이에게 기분을 색깔로 말해보는 연습을 여러 번 시키고 마음을 달래주자 어느 순간엔가는 화가 나는 상황이나 불편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면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내 발 언저리에서 시무룩하게 속삭였다.

“엄마, 나 지금 빨강이야.”

“뭐 땜에 빨강이 됐는지 말해줄 수 있어?”

그럼 아이는 왜 빨강이나 검정이 됐는지 조금씩 힌트를 주었고 감정의 원인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 색깔로 감정을 표현해도 격한 감정이 쉬이 사라지지 않을 땐 아이와 어떻게 하면 마음이 노랑이 될지 찾아보기도 했다. 아이는 직접 안아주거나 달콤한 걸 먹자고 했고, 책에서 가르쳐 준 수를 세보는 일도 했다. 신기하게도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들어가거나 눈을 흘기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화가 날 땐 내 마음까지도 아이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고 내 안의 야수를 끄집어내 아이에게 포효할까 싶어 두근거리기 일쑤였는데 놀랍게도 화가 날 때마다 무지개를 떠올린 순간, 우리 모자는 비온 뒤의 하늘에 뜬 무지개에 진짜로 가 닿은 것 마냥 한없이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우연히 만난 ‘화’ 에 빨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어디서 왔고, 어떤 이유로 왔는지 물어보고 관심을 가지자 화가 부끄럼을 느꼈는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마법. 그건 분명 비가 그치고 이어 해가 비치면서 나타나는 무지개의 황홀경 같은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나도 아이로 인해 감정이 너울을 뛸 땐 하늘을 바라본다. 요동치던 마음에 환한 무지개가 뜰 때까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아이를 바라보면, 빨갛게 보이던 아이의 얼굴에서 노란 웃음을 발견한다. 그렇게 아이와 수차례 무지개를 찾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언젠간 굳이 찾지 않아도 어느 사이엔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환하게 떠올라 있을 것이다. 화와 슬픔, 과격함이 무지개가 드리워진 마음엔 분명 더 커지거나 포악한 빛깔로 번지진 않을 테니. 난 오늘도 아이와 열심히 무지개를 찾는 연습을 한다.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알아채고 솔직하게 자신의 기분을 말해주는 날이 올 때까지.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고 있는 마음을 말로 표현해줄 때까지.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거친 비바람을 거두고 환한 무지개를 띄우는 그 날까지.

엄마도, 아이도, 화가 날 땐, 무지개다.

💬 전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푹 내쉬곤 했었는데 보기에 썩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자리를 피해 맘을 가라앉히는 연습을 하는데 물론, 쉽진 않지만 버럭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생각한답니다. 때론 시원한 냉동실 문을 열어보거나 달콤한 간식을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그럼 뾰족해졌던 마음도 어느새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거든요. 저만의 방법인데 의외로 효과가 있더라고요. 올맘님들은 어떠신가요?

객원 에디터  I  오은미

공룡을 사랑하는 5살 남자와 탱크를 사랑하는 37살 남자 사이에서 늘 고군분투하는 35살 여자이자 엄마예요. 육아를 시작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고 있어요. 참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많지만 그 속에서 감사와 행복을 찾으려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