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부터 해야할까, 엄마.
엄마, 나는 엄마로부터 받은게 많아.
어린날 사랑과 인정이 고팠던 내게 엄마는 사람들 앞에서 늘 당당하고 똑부러지는 멋진 사람이라 나는 엄마를 참 많이 닮고 싶어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런 엄마를 묘사하는 말과 비슷한 칭찬을 받을 때에는 많이 기뻤어. 돈이 없어 삶이 고달팠던 엄마를 보며 엄마가 행복했으면해서 집에 돈이 많았으면 바라기도 했지. 기억나? 초등학교 6학년때 학교에서 급식비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해서 손을 들어 신청했었어. 일반 급식비 청구서는 회색이었지만 지원을 받는 아이들은 노랑색, 빨간색지에 프린트된 청구서였는데 나는 다른 아이들과 구별되는 청구서를 받는 부끄러움보다 엄마에게 도움 되는 딸이 된 것 같아 뿌듯함이 더 컸었어. 집에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엄마에게 이야기 했을 때, 애써 눈물을 감추는 엄마를 보며 조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나. 나는 엄마도 나처럼 기뻐할 줄 알았거든. 지금에 와서 나도 딸을 키우는 엄마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엄마의 눈물이 이해가 가. 기특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조금 속상하기도 했을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내내 엄마가 말하는 '착한 딸'만은 아니었어. 이전엔 흐릿하게 보였던 엄마의 단점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거든, 청소년기때. 일과 돈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에 와 내가 잘못한 일을 지적하며 푸는 엄마의 모습, 가족간의 다툼이 있어도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 속에 있는 말을 필터링 없이 다 내뱉는 엄마의 모습, 화를 금방 내는 모습 등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 다짐을 했었었지.

이런 애증 속에 있던 나는 20대에 교육현장에서 일을 하며 심리를 공부하면서 관계를 다시 재정립하기 시작했어. 내 미래도 불투명하고 불안한 가운데 엄마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연습을 하는 건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지. 하지만 그 수많은 불안들과 포기하고싶은 마음들을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여기고 마음에서 밀어내며 앞으로 한 발 한 발 울면서 걸음을 떼었어. 이론과 실천은 전혀 다른 것이여서 나의 서투는 노력이 때로는 엄마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었을거야. 미안해요. 그래도 우리는 결국 우리만의 '적절한 거리'를 찾으며 나는 30대로 접어들었지.

타이밍이 참 절묘하기도 하지? 그 후에 내짝꿍을 만난걸 보면 말야. 내가 가족들과 했던 노력 덕분에 나는 그 사람에게 갖는 이성적인 호감과는 별개로 그 사람의 원가족과의 독립 정도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겼던 것 같아. 내가 학문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뤄냈던 그 과정을 그는 스스로 그답게 해왔더라구. 그러니 내가 놓칠 수 있었겠어? 고백도 프로포즈도 내가 먼저 한걸 보면 말 다했지.(물론 좋아하는 마음은 서로 같다는 확신 아래에서^^)

돌아오는 5월 15일이면, 그와 연인이 된지 횟수로 8년이 되더라. 나는 지금도 한결같은 그를 보며 나를 얼마나 셀프 쓰담쓰담하는지 몰라. 시댁식구들과 기분좋은 만남들을 지금껏 가져오는 걸 보면 그것의 8할은 그가 나를 만나기 전에 만든 '거리' 덕분이라 생각해.

여전히 내 안의 내면아이는 엄마아빠로부터 받았던 상처 때문에 자리잡게 된 게 크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의 소중한 장점들 또한 엄마아빠 덕분에 가진 것들이기도 해.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아.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의 젊은 날을 생각할 때가 많아. 20대에는 정말 노력 노오오력해서 이성적으로 엄마를 이해해보려 에너지를 썼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아..그래서 그랬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어. 그래서 어린날 받았던 상처들이 이전보다 조금 더 감당할만해지거나 아예 '아픈 상처'에서 '그저 흉터'로 변한 것들도 많아.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것들도 '조금 덜 그래야지' 로 바뀌기도 하고 말이지.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원가족과의 관계도 정리하지 못한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답답한 남편에 속터지고 생활고로 힘겨웠을 여자 영희를 떠올리면, 안쓰럽기도 기특하기도 이해가 되기도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울고 넘어지면서도, 두 딸을 키워내느라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고마워요.

엄마가 요전번에 말했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엄마는 항상 꼭 끼는 정장차림의 옷을 착용한 것 같은 나날을 살아온 것 같아. 이제는 편안한 원피스 입은 아름다운 삶을 살아보아야겠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응원해주는 우리 딸들 사위들이 곁에 있으니 힘이나네. 고마워~ 사랑해!'

엄마, 나는 정말 엄마로부터 받은게 많아.
영희의 빛나는 60대를 응원해요. :)
사랑해요, 엄마.